경제논평

언제부터인가 ‘레트로’라 부르는 복고주의 붐이 불고 있다. 1970~80년대의 패션이 등장하고 그 시절의 음악을 다시 부르는 리메이크도 유행이다. ‘응답하라 1988’처럼 당시의 시대상을 요즘 배우들이 연기한 드라마가 큰 히트를 치기도 했다. 현재가 고달프니 과거에 매달린다는 얘기도 있고, 당시에 청년이었던 지금 중장년들의 향수(nostalgia)와 지갑을 동시에 저격하는 상술이라는 친절한 해석도 있다. 문화 현상이야 내 전공이 아니니 할 말이 없다. 어차피 일상에 별 지장을 주지 않는 이런 얘기들은 흘려들으면 그만이다.

이런 복고풍이 요즘은 조선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주식시장에는 동학개미가 들끓고 여의도에는 토착왜구가 출몰한단다. 그런데 동학이나 왜구 같은 용어는 쓰는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될 수 있기 때문에 한번은 멈칫하게 된다. 전봉준은 나와 종씨라 동학운동은 예전부터 맹목적으로 지지했고 우리 집안은 친일 행적을 할 정도로 잘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하지만 떡볶이의 단짝인 오뎅을 시키다 ‘아차 어묵이라 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평소에는 초밥이란 단어를 멀쩡히 쓰다 가도 일식집에 가면 스시라는 표현이 자동으로 나오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 평소 즐기던 아사히 맥주와 싼 맛에 가끔 찾던 유니클로 셔츠를 사는 빈도도 확실히 줄었다.

좀 괜찮은 정부만 만나면 우리 기업들이 일본을 제치는데 10년도 안 걸린다고 믿는 나는 ‘국뽕’은 아닐지언정 친일파와는 거리가 멀다. 아베 수상의 국수주의를 경멸했고, 그가 쏘아 올린 세 가지 화살의 효과에 대해서도 냉소적이다.[1] 하지만 이미 입에 밴 오뎅이란 단어를 사과하듯이 써야 하고 만 원짜리 티셔츠에 내 애국심을 테스트 당하는 현실은 불편하다. 입으로는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외치지만 머릿속엔 집단주의적 사고로 꽉 찬 지배 엘리트들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 한번 못 펼치고 지레 움츠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 고운말 다 좋은데 언어는 역사적 관행의 산물이라는 것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한술 더 떠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너도 이래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중우정치와 만날 때는 정말 반발심이 생긴다. 일상 용어로 토착화된 외래어는 부분적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묵이라고 고쳐 쓰려 노력하지만 내 또래 사람들이 오뎅이라 말해도 상관없다 생각한다. 라디오를 소리통으로 부르자고 누가 나서면 애국적이라 생각하기보다는 열등감이라 여기기 쉽다. 정작 고쳐야 할 일본식 용어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제’라는 말은 일본 제국주의의 줄인 말이다. 북한 방송에서 즐겨 쓰는 미국 제국주의와 동급 표현이다. 제국주의 국가는 다른 나라의 영토는 물론 사상이나 문화까지 지배하려 드는 습성이 있다. 유럽 대륙의 강국들과 영미권 국가 간에는 국가철학의 차이가 있고 이는 법, 정치, 경제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표면화된다. 단순화의 오류를 감수하며 간단히 요약하자면 ‘국가 대 시민’, ‘정부 대 시장’이라는 대립 구에서 영미(Anglo-American) 전통은 상대적으로 후자를 강조한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독일 등 유럽대륙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것이 ‘충성(loyalty)’을 강조하는 사무라이 집단 문화와 섞이면서 국가주의 색깔이 더욱 짙어졌다. 우리는 36년의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일본식 국가 철학을 체득할 수밖에 없었는데, 20년 가까운 박정희 집권 시절에도 일본이 암묵적인 롤 모델인 분야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관공서나 법원에서 쓰는 용어를 보면 아직도 어려운 일본식 한자어가 많다. 미국 박사가 대세인 경제학계에서도 일본 냄새 물씬 풍기는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경제학 용어는 아담 스미스의 모국어인 영어가 원전이다. 예를 들어 비효율을 의미하는 ‘Deadweight loss’라는 용어를 ‘자중손실’이나 ‘사중손실’이라 하는데 이런 일본식 번역을 보고 뜻을 이해하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태생이 외래종이라면 원어를 그대로 쓰거나 아니면 맥락에 맞게 비효율, 효율비용 식으로 풀어 쓰는 게 맞다. 능력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원칙을 말하는 ‘Ability to pay’도 그냥 능력원칙이라 부르면 충분한데 ‘응능원칙’이라는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 코로나 위기의 후유증으로 정부 빚이 늘어나면서 ‘국가채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이 용어는 정부가 진 빚이지 국가를 구성하는 다른 주체들의 부채는 포함하지 않는다. 절대 왕정 시절에는 왕이 곧 국가이고 국가가 곧 정부라 해도 시비 걸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21세기의 민주국가에서 ‘정부가 국가 일을 하는 것’과 ‘정부의 살림살이 자체’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국가주의에 찌든 통치 엘리트가 장기 집권하는 나라도 아닌 우리가 정부 살림을 국가 살림이라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국가 경제라 할 때는 가계, 기업, 정부 등 모든 경제주체의 활동을 포함한다.

공공부문은 범주가 애매하고 나라마다 용어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국제기구나 대다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만든 표준 분류법을 사용한다. 정부부채라 하더라도 상환 시점과 금액이 확실하게 정해진 것도 있지만 잠재적 채무(contingent liabilities)의 성격을 지닌 항목도 많아 아예 좁은 기준에서 넓은 기준까지 몇 단계로 부채 범위를 정의한다. 이렇게라도 용어의 불확실성을 줄여야 통계의 신뢰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도 이런 국제표준에 맞게 통계를 발표한다. 문제는 이때 사용하는 용어다. 언론 보도에 나오는 우리나라 정부부채 통계를 보면 좁은 기준은 ‘국가채무’이고 넓은 기준은 ‘국가부채’이다.[2]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채무와 부채의 차이가 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전문 용어의 생명은 정확한 의미 전달이다. 산자락의 야생화도 매발톱꽃, 쥐오줌풀 등 들으면 이미지가 떠오르게 이름을 짓는다.

얘기 나온 김에 조세부담 수준을 표현하는 용어도 손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통상 세금이라고 부르는 항목들만 포함한다. 대신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 같은 사회보장성 부담을 더한 개념은 ‘국민부담률’이라 부른다. 하지만 사회보장 부담금은 버젓한 세금이다. 사회보장세(social security tax)라 부르는 나라도 많다. 국제기구가 각국의 조세부담 수준을 비교할 때는 이런 사회보장세를 포함한 개념을 기본으로 쓴다. 그냥 ‘광의의 조세부담률’ 정도로 부르면 될 것을 애매모호한 ‘국민’이란 단어를 왜 끌어들이는지 모르겠다. 아마 수치가 더 높게 나오는 개념에 세금이란 단어를 넣기 부담스러워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국민은 세금 말고도 환경 공해, 정치 공해 등 부담스러운 것이 많다.

복잡한 정부 회계를 정확히 표현해줄 용어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단계적으로라도 고쳐나가야 한다. 어떤 식으로 개편을 하건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이 쓰던 국가부채라는 잘못된 용어를 계속 쓸 이유가 있을까. 정부가 곧 국가라는 제국주의적 사고의 암묵적 발현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꾸는 것이 옳다. 지난 얘기지만 국가부채란 용어 대신 정부부채를 써야 한다는 내 주장에 동조한 공무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경직적인 관료 문화에서 관행을 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현대 감각을 지니며 복고풍을 즐기는 것과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나도 한일전 축구를 하면 기꺼이 국수주의자로 돌변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일본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경계도 해야 하지만 협력도 필요한 주변 강국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바뀌어 가는데 토착왜구 같이 애매한 표현으로 중우정치를 유도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일본을 극복하려면 알게 모르게 우리 의식을 지배하기 쉬운 용어부터 바꾸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동학개미 같은 부담 없는 레트로 감성을 덤으로 얹어. (21.8.25, 2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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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년 시작된 ‘아베노믹스(Abenomics)’는 통화, 재정, 구조개혁 세 분야로 나눠진다. 이중 재정정책은 내용이 애매하고 구조개혁은 선언적 느낌이 강하다. 결국 크루그먼(Paul Krugman) 같은 외국 학자의 자문을 받아 돈을 왕창 푼 것이 거의 전부다.

[2] IMF에서는 정부채무의 범주를 포함되는 채무의 범위에 따라 좁은 범위(D1)부터 넓은 범위(D4)까지 분류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면서, 현금주의 방식의 국가채무(D1), 비영리공공기관까지 포함하는 일반정부 부채(D2), 비금융공기업까지 포괄하는 공공부문 부채(D3)로 분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D1을 가리키는 말로 ‘국가채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D2 또는 D3를 가리키는 말로 ‘국가부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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